동양에도 논리와 수학과 자연에 대한 관심이 모두 있었다. 그러나 재료는 저절로 모이지 않는다. 자연을 아는 일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지향이 있어야 계산과 관측과 논증이 서로를 부른다. 조건이 지향을 낳고, 지향이 형식을 부르고, 형식이 조립을 가능하게 한 2,400년의 경로를 따라간다.
기획 의도
이 책은 문명의 우열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동양이 부품을 갖고도 조립을 게을리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사유를 크게 나누면 인간을 묻는 줄기와 자연을 묻는 줄기가 되는데, 그리스에서 시작된 전통에서는 이 둘이 나란히 섰고 동양의 주류 전통에서는 뒤의 줄기가 앞의 줄기에 매여 있었습니다. 자연을 캐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물음이 언제나 수양과 통치와 해탈로 돌아가 자기 목적을 가진 줄기로 서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추상을 길들인 배경, 질서를 둔 자리, 참을 판정하는 형식, 앎이 향한 목적, 지식을 검증한 공동체, 만드는 손과 설명하는 눈의 만남이라는 여섯 조건을 따라 근대과학이라는 특수한 지식의 형식이 어디서 어떻게 조립되었는지를 살핍니다.
예상 독자
과학의 탄생을 발명 연대기가 아니라 철학·문명·제도의 결합으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 니덤의 물음과 시빈의 반론 사이에서 동서 비교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교양 독자.
목차
프롤로그 · 우리가 딛고 선 전제
서장. 과학을 부르는 기준
- 1장 만드는 것과 설명하는 것 — 기술은 ‘된다’에서 멈춘다
- 2장 틀릴 수 있는 형식 —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것은 답이 아니라 그릇이었다
- 3장 폐기될 수 있는 지식 — 갈레노스는 무너졌고 오행은 무너지지 않았다
- 4장 플라톤은 아직 연구실에 있다 — 하이젠베르크, 괴델, 펜로즈, 그리고 ‘발견했다’고 말하는 수학자들
- 5장 부품과 지향 — 과학은 한 번에 발명되지 않았다
1부. 플라톤을 가능하게 한 조건: 추상을 길들인 배경
- 6장 뜻을 지운 문자 — 알파벳과 수학의 추상화
- 7장 서로 다른 것을 하나의 척도로 — 주화가 길들인 추상
- 8장 왕도 신관도 진리를 독점하지 않았다 — 폴리스라는 공백
- 9장 쪼개진 땅, 도망갈 수 있는 사상가 — 그리스의 분열과 제자백가의 개화
- 10장 변화는 없다 — 파르메니데스가 남긴 문제
- 11장 그 공백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이데아계
2부. 본질이 자리 잡은 곳: 객관적 질서의 자리
- 12장 스스로 그러함 — 도가가 두 번째 세계를 세우지 않은 이유
- 13장 리(理)와 기(氣) — 질서는 세계 안의 무늬다
- 14장 동굴 밖의 태양 — 플라톤이 본질을 세계 밖에 둔 이유
- 15장 이데아를 땅으로 끌어내리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반역
- 16장 형상과 질료 — 개별 사물이 연구 대상이 되다
- 17장 내재·깨달음·초월 — 중국·인도·그리스의 세 갈래
3부. 참을 판정하는 형식: 논리와 증명의 길
- 18장 이름이 사물을 붙잡는 범위 — 묵가와 명가의 논리
- 19장 해탈을 위해 논쟁하다 — 인도 니야야의 추론 체계
- 20장 올바르게 생각하는 형식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 21장 답이 아니라 필연 — 유클리드가 세운 증명의 세계
- 22장 계산과 증명의 서로 다른 길 — 『구장산술』·천원술·케랄라 학파
- 23장 논리가 자연학의 문법이 되다 — 개별 논쟁에서 연구 체계로
4부. 앎이 향하는 목적: 수양·해탈·바라봄
- 24장 궁구하여 수양에 이르다 — 격물치지가 향한 곳
- 25장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앎 — 인도 철학의 목적
- 26장 보는 것 자체가 좋은 삶이다 — 그리스의 테오리아
- 27장 가장 하찮은 동물도 알 가치가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연구
- 28장 쓸모없는 지식이 학문이 되다 — 독립된 탐구의 탄생
5부. 지식을 보존하고 검증하는 공동체: 논쟁·전승·제도
- 29장 아고라에서 진 주장도 살아남는다 — 그리스의 공개 논쟁
- 30장 논쟁대회의 나라 — 인도에서 논리가 이어진 방식
- 31장 과거시험이 모은 재능, 과거시험이 정한 질문 — 중국의 경우
- 32장 사라질 뻔한 아리스토텔레스 — 시리아와 이슬람의 번역·보존
- 33장 반대 의견부터 말하라 — 스콜라철학의 질문법
- 34장 대학이라는 기억 장치 — 권위가 반박자를 길러내다
6부. 만드는 손과 설명하는 눈: 기술에서 실험으로
- 35장 화약·나침반·인쇄술 — 발명이 곧바로 이론이 되지 않은 이유
- 36장 하늘을 가장 오래 기록한 사람들 — 관측이 천체역학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
- 37장 손과 글이 갈라진 사회 — 사대부·장인·카스트의 경계
- 38장 책과 몸이 충돌하다 — 르네상스 해부학과 베살리우스
- 39장 기구가 논증이 되다 — 망원경·시계·저울·공기펌프
- 40장 누구나 다시 해 볼 수 있어야 한다 — 실험과 재현의 탄생
7부. 자연을 법칙으로 읽다: 과학혁명의 마지막 조립
- 41장 신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했다는 상상 — 이데아에서 법칙으로
- 42장 자연이라는 책을 수학으로 읽다 —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 43장 원을 버리고 질서를 지키다 — 케플러의 타원
- 44장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하다
- 45장 장인의 손·수학자의 기호·자연철학자의 질문이 만나다
8부. 뉴턴의 과학혁명과 그 이후: 세계를 바꾼 지식의 형식
- 46장 뉴턴 — 여섯 조건이 한자리에 모이다
- 47장 둥근 지구가 중국에 도착하다
- 48장 니덤의 물음과 그 비판자들
- 49장 뉴턴 이후 — 그 틀 안에서 오늘까지
- 50장 기계가 다시 거는 오래된 내기
에필로그 · 과학은 어느 문명의 소유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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